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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물류현장 속 빛바랜 ‘노동자 처우’ 현실

노동환경 실태조사⋯ 온열질환 증상 경험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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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한국 물류산업은 디지털전환, 자동화설비, AI솔루션 최적화까지 ‘첨단’의 현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하지만 화려한 기술혁신 이면에 여전히 남은 균열이 있다. 바로 ‘사람’에 대한 투자가 뒷전으로 밀린 현장 근로자 처우다.

연일 이어지는 최고기온, 그리고 주 52시간근무제 예외 적용, 가속되는 비정규직 고용구조 속에서 노동자들은 여전히 ‘속도’와 ‘효율’만이 우선시되는 작업환경에 내몰려 있다. 컨베이어 벨트 위를 하루에도 수천번 오가는 발걸음과 쉼없는 반복노동. 근로자의 피로와 건강권 문제는 낮은 임금, 불안정한 고용과 더불어 첨단기술과 상반되는 물류현장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노동자 63%, 30°C 이상 환경 근무
정부와 안전보건공단 등은 올여름을 맞아 현장점검을 강화했다. 물류센터 실태조사와 함께 냉방·통풍장치 현황, 휴식공간 확보 실태, 폭염예방 5대수칙(물·바람·그늘·휴식·응급조치) 준수여부 등을 집중적으로 확인하며 온·습도계, 보냉장구 등 물품도 배부했다. 



쿠팡, CJ대한통운 등 국내 대형 물류기업도 온열질환 예방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차폐식 냉방작업구역과 대형 실링팬, 온·습도 자동센서, 쿨링포그(얼음분사시설) 등 기술기반의 작업환경 개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혁신의 혜택은 아직 절반에 불과하다. 이러한 조치 역시 다수 사업장에서 휴게실 형태의 ‘형식적 설치’에 머물거나 일선현장은 여전히 고온·고강도 노동환경이 이어지는 게 현실이다.

올해 7월 광주 쿠팡물류센터 노동인권 실현 시민모임과 언론 합동으로 이뤄진 ‘노동환경 실태조사’(쿠팡 광주센터 노동자 177명 대상)에 따르면 응답자 63%(112명)는 ‘30°C 이상 환경에서 근무한다’고 답했고 그중 16%(28명)는 35~39°C, 2%(4명)는 40°C 넘는 극한 노동환경에 노출돼 있었다. 냉방설비 유무에 대해서는 66%(116명)가 ‘선풍기만 있다’고 답했고 3%는 냉방장치가 전혀 없는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더욱이 실제 온열질환이 의심되는 어지러움·두통·식욕저하 등의 증상을 경험한 노동자는 59%에 달했다. 

첨단설비와 투자에서 소외된 다수 소규모현장은 여전히 고온·과로·불안정한 고용에 노출된 채 ‘불가마’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주7일 배송 확대⋯ 인력충원 방안 無
게다가 현장에선 물류자동화가 곧 ‘노동경감’이나 ‘삶의질 향상’으로 곧장 이어지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여전하다. 자동화설비 도입 후에도 인력은 대거 투입되고 피크시간대 집중투입, 밤샘분류 등 기존 인력구조가 고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물류센터는 하청·일용직, 초단기 근무가 대부분이다. 물량증감에 따라 불규칙 고용, 임시직·계약직 비중이 높아 산재·고용보험 사각지대가 만들어진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산업별 보고서에 따르면 물류센터 근로자 중 파견·하청·일용직, 단기계약이 65~70%를 차지하며 ‘주문량에 따라 고용이 불규칙하고 임시직 비율이 상시직을 크게 웃돌며 고용·산재보험 적용률이 매우 낮다’고 분석하고 있다. 2025년 상반기 기준 일부 기업에서는 산재보험 미가입률도 40% 이상인 것으로 드러났다.

노동강도도 심각하다. 택배·물류시장 특성상 주·야간 교대와 주 60시간을 초과하는 연장근무가 만연해 있다. 최근 CJ대한통운 등 대형택배사는 주7일 배송제를 확대 중이다. CJ대한통운은 택배노조와 협의 끝에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하기로 했으나 구체적인 인력충원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야간노동 역시 규제 부재로 수면장애·밀린 휴식이 일상이 됐다.

사각지대 없는 현장반영 정책 나와야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생활물류센터 노동자들의 단위시간당 할당량(피킹, 분류량 등) 상한선 설정 등으로 과로위험을 법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했다. 일본, 유럽 등도 강제적 ‘WBGT(습구·건구 복합지수)’기준 도입 및 작업중단, 온열질환 신고·대응시스템 등을 법에 반영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산업안전보건기준 개정을 통해 31℃ 이상 고온작업장 작업시간 조정, 실시간 온·습도 측정, 폭염휴식시간 규정 등이 신설됐다. 그러나 예산, 운영방식, 외주관리, 고용보험 등 교차적 한계와 사각지대 존재로 현장체감도는 낮다.

근본적 변화를 위해선 실태조사와 함께 △실내냉방 및 환기설비 의무화 및 실질적 확대 △현장주도형 휴게시설 설치 및 휴게시간 실질 보장 △고용안정화·정규직확대·고용·산재보험 전면 의무화 △적정노동강도 유지(작업량·할당제 규제) △24시간 교대근무 최소화 등 근로자안전권 최우선정책이 절실하다.

뜨거운 작업환경과 무리한 노동강도에 의한 현장사고는 단지 노동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물류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심각한 경고음이다. 속도경쟁과 생산성 향상을 넘어 사람중심의 일터혁신이 산업의 진정한 경쟁력이 돼야할 것이다. 2025년 여름이 물류현장의 민낯을 보여준 계절에 그치지 않도록 지금이 바로 근본적 변화를 시작할 때다.